
소설을 읽다가 멈추는 순간이 있습니다
문장 하나가 너무 정확하게 내 마음을 건드려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순간입니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순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습니다.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읽고 나면 오래 아립니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소설입니다
작가 박민규는 누구인가
박민규는 한국 현대문학에서 독보적인 문체를 가진 작가입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국문학상과 문지문학상을 받으며 주목받았습니다. 그의 소설은 사회의 구석에 있는 사람들을 따뜻하고 날카롭게 바라봅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그 시선이 가장 아름답게 담긴 작품입니다
파반느란 무엇인가
파반느는 16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느리고 장중한 춤곡입니다.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작곡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피아노 곡에서 제목을 따왔습니다
라벨은 이 곡에 대해 특별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죽은 왕녀가 누구인지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박민규는 바로 그 여백 안에 이 소설을 씁니다. 세상이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를

줄거리
이야기는 한 남자의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대학 시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났던 한 여자를 기억합니다. 그녀는 세상이 말하는 기준으로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뚱뚱하고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녀를 쉽게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그녀는 달랐습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가까워집니다. 음악을 함께 듣고 함께 걷고 서로의 무게를 잠시 나눕니다. 음악이 끝난 순간 마음에 드세요. 하고 그녀가 속삭였습니다. 무어라 답하진 않았지만 무어라 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 앞에서 그는 그녀의 손을 제대로 잡지 못합니다.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봐줄 수 없는 세상 안에서 그는 결국 그녀를 지키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사라집니다
남자는 그제야 깨닫습니다. 자신이 그녀를 왕녀처럼 대하지 못했다는 것을. 세상이 그녀를 지울 때 함께 지워버린 것은 아니었는지를
소설은 그 기억을 천천히 되짚으며 흘러갑니다. 극적인 반전이 없습니다. 화려한 사건이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아픕니다. 그래서 더 오래 남습니다


이 소설의 핵심 주제
첫번째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에 대하여
세상이란 이름의 벌레였다
이 한 문장이 소설 전체를 관통합니다. 외모로 존재의 가치를 매기는 세상은 조용하고 집요하게 사람을 갉아먹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 박민규는 소리치지 않고 조용히 보여줍니다
두번째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처음 읽으면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상대의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오해 위에서 사랑은 시작됩니다
세번째 감정을 숨기는 삶에 대하여
아무렇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아무렇지 않아. 라고 나는 답했다
얼굴의 내부는 온통 울부짖는데 얼굴의 겉은 울 수가 없는 거야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는 삶. 안과 밖이 다른 삶. 이 소설은 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네번째 상실의 감각에 대하여
무언가 갑자기 줄어든 느낌이야
다시는 찾지 못할 나 자신. 그러나 언젠가는 떠올리게 될 나 자신. 그리고 다시는 하나로 결합되지 못할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며 나는 커피를 마셨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그 사람만 잃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과 함께였던 나 자신도 잃는 것입니다. 그 감각을 박민규는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오래 남은 문장들
길고 끝없는 계단의 어딘가에서 꺼져가는 촛불을 든 채 서 있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의 나도 스무 살의 나도 그녀를 사랑하고 사랑했었다
문득 이 편지도 결국엔 나 자신을 위해 쓰는 게 아닌가 생각이 치밀어 오릅니다. 하지만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란 생각에 또 당신이라면 이런 투정을 두말없이 받아주지 않겠나 하는 이기심으로 계속 글을 이어갈 작정입니다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해주지 못했다는 후회가 있는 분. 세상의 시선 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분.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며 살아온 분. 아름다운 문장으로 천천히 마음을 두드리는 소설이 읽고 싶은 분
박민규의 문장은 짧은데 깊습니다. 읽고 나면 오래 아립니다. 그리고 그 아림이 나쁘지 않습니다. 좋은 소설이 주는 감각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